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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식민지해방운동은 보편적으로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사회를 달성하는 일이었다. 한국의 독립운동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펼치는 주체에 따라 지향점에 차이를 보였다. 의병이나 계몽운동은 모두 자주독립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었지만, 그 색깔이나 방법에서 차이가 있었다. 의병 지도자들은 비록 독립을 달성하더라도 군주사회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사회를 고집하는 것이 그들의 사상이자 지향점이라는 뜻이다. 이와 달리 계몽운동가들은 민주공화제를 지향하고 있었다. |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사회가 새로운 지향점으로 등장한 것이니, 계몽운동은 사상적으로 의병보다 진보적이었다.
또 의병과 계몽운동 두 계열은 독립운동 방법에서 심각한 차이를 보였다. 의병은 직접 무장투쟁을 펼치는 것이므로 곳곳에서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계몽운동가들은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신문과 잡지를 발간하여 민지를 개발하며,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을 육성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이런 차이는 그저 단순한 차이로 존재하지 않고, 방법상의 차이는 결국 갈등을 빚어내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심각하여, 심지어 곳곳에서 의병이 신식학교를 공격하여 교사를 살해하거나 학교를 불태우는 일이 발생할 정도였다.
독립운동 선상에 나타난 분화와 갈등은 결국 1910년 나라를 잃고 난 뒤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쪽으로 발전하였다. 의병과 계몽운동이 하나의 광장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 그 효시가 대한광복회요, 그것을 주도한 인물이 박상진이다. 그가 풍기에서 광복단 주역을 만날 때까지, 광복단은 의병계열의 한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에서 법률과 경제라는 신학문을 터득하고 법관시험까지 통과했던 박상진은 계몽운동을 지향하던 새로운 시대의 인물이었다. 양대 계열에 모두 친근성을 가진 그가 만주와 연해주에서 개척되어가던 독립군기지를 보면서 국내의 의병계열 인물과 통합을 모색했던 것이 바로 대한광복회라는 결실을 거두게 되는 과정이었다.
박상진의 행적은 곧 한국근대사,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주요한 발전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갈등의 극으로만 달리던 독립운동의 두 흐름을 하나의 광장으로 묶어낸 것이다. 사상적으로 진보성을 확보하면서, 투쟁방법에서는 무장항쟁 노선을 받아들여 독립전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의병 지하결사체를 만주 독립군기지와 연결시키고, 계몽운동 조직에 무장항쟁 방법을 접목시켜 이를 하나로 통합시켜 나간 그의 노력은 한국사를 한걸음 발전시켜 나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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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은 성장과정에서 우선 의병계열의 영향을 받았다. 허위와의 만남과 영향이 그를 의미한다. 그러나 서울에 진학한 뒤에 물론 허위의 영향이 지속되었지만, 양정의숙 수학과정을 통해 근대지향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고 계몽운동 성향을 갖게 되었다.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마자, 그가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본토 지역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몸 바칠 독립운동의 방향을 가늠하였다. 그 결론은 독립전쟁이고, 그를 위해 만주지역에 독립군기지가 제대로 운영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국내에서 인력과 재력의 지원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판단은 지극히 정확한 것이었다.
자신의 행로를 정한 박상진은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했다. 자금을 확보하는 사업을 펼치고, 국외로 연결하는 루트를 만들면서, 인적자원을 만주로 내보내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상회를 만들거나 동지들에게 회사를 개설하도록 주문하고, 연결망 확보를 위해 국내외 요지에 거점을 확보했다. 자금 확보가 목표치에 쉽게 이르지 못하자, 그가 의병출신 인사들과 협의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현금을 수송하는 우편마차를 습격하거나 광산을 공격하고, 또 친일 부호들을 공격하여 자금을 마련해 나갔다.
박상진은 독립운동의 영역을 시군처럼 작은 지역에 국한시키지 않고 한국인이 거주하는 국내외 전역으로 설정하였다. 충청도지부라거나 만주지부(본부)라는 말처럼 그의 활동이 지향하는 틀은 전체 민족을 포괄하는 큰 틀이었다. 이러한 틀을 후손들이 오히려 지역적으로 묶어두려는 일이 있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역사는 분화와 통합을 거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 전통시대에도 사상이나 정책에서 수없이 분화와 통합을 거쳤고, 근대나 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근대사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부분이 위정척사와 개화사상의 분화와 통합이고, 의병과 계몽운동의 분화와 통합이며, 사회주의 수용을 둘러싸고 나타난 분화와 통합 노력이다. 특히 국가를 상실 당한 처지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 두 줄기로 나뉜 에너지를 하나로 묶어 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박상진이다.
박상진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결정적인 교훈을 줄만한 인물이다. 개인 . 지역 . 집단이기주의가 사회발전을 가로 막고 있는 요즈음, 자신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 발전을 도모 하려 했던 그의 삶은 Noblesse Oblige라는 말 그대로, 가진 자와 배운 자가 역사적 책무를 다하려 했던 표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대구감옥에서 세상을 떠나던 당일에 읊은 시에서 그는 이룬 일 하나 없다고 자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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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가 읊은 것처럼 ‘이룬 일 하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사를 한 걸음 앞으로 끌고 나가는 인물이었고, 그 업적은 높이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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